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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소곤 일상

Agent P 의 정체

디아나§ 2015. 9. 8. 23:34

 

 

 그 전날 들른 빅씨에서 naughty 한 몇가지를 질렀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들어갔는데 방금 캣워크를 (아니면 최소한 아메리칸 넥스트 탑모델이라도) 걷다 왔을 것같은 여자가 애인으로 보이는 듬직한 중년 남자와 한창 쇼핑을 하는 중이었다. 그외에 한두명 정도 더 있었지만 메인은 그들이라 직원 두셋이 미국 특유의 잇몸+이미소를 지으며 응대중이었고 그들은 "어머, 자기가 사주는거야? 고마워" 같은 soap drama 나 로맨틱 코미디에 나올법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구석에서 조금 만지작대다 불현듯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 나와버렸는데 왜 갑자기 그랬는지 생각을 해봤다.

 

 

 내가 백인이 아니라? 내가 그녀만큼 마르지 않아서? 브랜드에 어울리는 분위기(또는 몸)가 아니라? 내게 그런 선물을 해주는 남자가 옆에 없어서? 내가 돈이 없어서? 혹은 없어보일까봐? 소호 골목에 큰 쇼윈도 앞에 걸터앉아서 스트레스 받았을때 먹는 스트로베리 프로스팅이 이빨이 아플만큼 단 컵케잌을 먹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답은 잘 모르겠지만 저건 아닌것 같았다. 백인이 되는것 말고는 왠만한건 해봤지만 그런 상황이라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행복한건 아니었다. 뭘까 뭘까 하면서 컵케잌을 와구와구 반 정도 먹었을때 Deja vu 처럼 비슷한 감각의 기억이 났다. (아, 이게 프랑스어로 있었던거 같은데.) 10여년 전쯤에, 나는 모든것을 제쳐놓고 외모만으로 평가받는 집단에 잠깐 끼었던적이 있는데 지방 관청에 있는 디룩디룩 아저씨들과 이유를 알수없는 호텔 만찬 자리가 일정에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나보다 몇살위인 언니들은 대개 분위기에 잘 적응 했고(?) 호호 하면서 말을 받아주거나 와인을 따르거나(?) 뷔페에서 어르신들이 먹기 편하게 과일을 접시에 갖다 놓기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자리에 끼어본 나는 그들 사이에 뚱하고 앉아 있었는데 약간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어쩐지 경쟁 의식이 자극되는 분위기에서 뒤쳐지고 있는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런 경쟁을 해야할 일인가 하면 뭔가 그건 아닌것 같고. 지금 돌이켜보면 내 가치관이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었던거고 어려서 그런 확신은 없었던 나는 할수 없는 일을 할수는 없고 분위기에 적응을 못한 것처럼 보이니 죄책감을 가지게 됐던것 같다. 그래서 그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혼자 뷔페를 몇접시 가져다 와구와구 먹었다. 엄마가 그토록 어렵게 뺀 2kg을 지키도록 신신당부 했건만.

 

 

 그래서 이야기의 결론은 나는 컵케이크 하나를 꿀꺽하고 나서 다시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걸려있는 대부분의 인기 제품을 모두 입어보고 거울앞에서 빙글빙글빙글 인형 놀이를 하다 맘에 드는 작은 걸 내돈으로 샀다는 거다. 내 account 잔고만 빼곤 해피엔딩 ^^

 

 

- 올 겨울에 무슨 앤젤스 캣워크를 하려고 이렇게 잘 보여지지 않는 쇼핑만 하다 돌아왔나 모르겠지만, 내숭이 필요한 사회에서 조용히 웃고 있다가 돌아와 열어볼 상자가 생긴다는 것은 괜찮은 탈출구다.

 

- 하지만 진짜 결론은 그래서 컵케이크도 맛있고 아장짱도 좋다. 하지만 둘은 양립할수 없겠지.. (아장짱을 입고 살이 쪘을때를 그려봤는데 라인 사이사이로 살이 푱푱 나오면 개그겠구나) 퓩퓩 한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