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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소곤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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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 2014. 10. 20. 23:09

한국말로 쓰는 어감도 좋아서. < I'm not there> 라는 영화가 있었다. 뮤지션 밥 딜런의 생애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 전기 영화였는데 밥 딜런의 시기 별 아이덴티티를 일곱명의 다른 배우가 맡아서 연기했다. 히스 레저부터 크리스천 베일, 리처드 기어, 케이트 블란쳇까지 무척이나 매력적인 배우들이 동등하게 등장한다. 여기서의 '동등함' 이란 뒤에 나온 배우나 더 나이든 밥딜런을 연​기한 배우가 더 우월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음악적 완성도라는 일측면에서는 방향성을 찾을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각 캐릭터들은 거의 병렬적이다.

예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갔을때,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는 아트 프로젝트가 있었다. 계단 없이 둥글둥글 돌아가는 뮤지엄을 따라 올라가며 한층마다 초등학생 - 고교생 - 20대 청년 - 중년 - 노년기의 사람들이 각각 관람객 한명에게 질문을 하고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주제는 'Progress'. 귀여운 꼬마애가 progress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라고 묻는걸로 시작되었는데 정확히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연 나이듬에 따라 우리는 progress하는 것일까 란 의문을 가졌었다. 때때로 과거의 나는 현재보다 현명하며 완성되어 있다. 나의 자제력과 집중력은 국민학생 때 가장 뛰어났다. 내 감수성은 스무살에 떠난 유럽에서 그 어느때보다 순수하고 민감했다. < 나쁜피 >에 나왔던 스물다섯살 쥴리 델피의 비현실적인 싱그러움은 어떤 현자의 깨달음보다 진리에 가까워 보인다. 너무 역방향만을 주장했다면, 나의 노년은 세상 뒤켠에서 조용히 보낼지도 모르지만 정서적인 안정감과 사랑하는 작가들과의 교감 면에선 어느때보다 행복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균형이 깨어지는 것은 실패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덴티티가 시작될 뿐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나를 깨닫고 미래의 나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있다.

사실 진화에 방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