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나

< 5일의 마중 > 먼지와 피아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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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의 마중 > 먼지와 피아노

디아나§ 2014. 10. 14. 20:44



시대극이나 비극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광고하는 대로 장예모와 공리의 영화이므로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아직 낮 햇살은 따뜻한 10월의 휴일날 한정거장 정도 걸었고 영화관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 내 친구는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영화 시작 전까지 두 번 정도 깨웠지만 많이 피곤한듯 하여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애틋한 시선을 거두어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니 영화가 시작됐다.

이 영화는 문화 대혁명 시기에 반동 분자로 몰려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공리 역)의 이야기다. 십년 동안의 남편의 부재, 꿈을 접어야 하는 딸의 아버지를 향한 원망, 그런 중에도 남편을 존중하는 부인 등 가족의 비극을 비교적 잔잔하게 그려나간다. 극적인 장면이라고 하면 격동기가 지나고 억류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남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를 마주하는 순간 정도다. 이전에 도망나왔던 남편에게 문을 열어주지 못한 죄책감과 눈앞에서 남편이 다시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심인성 치매로 부인은 남편의 얼굴을 잊는다. 아니, 남편의 이름과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딸이 남편을 고발했다는 사실만이 강렬하게 남아 교사로서 품위있던 그녀의 삶은 모두 빛을 잃는다. 이 영화는 발레리나이던 꿈을 접고 방직 공장에서 일하게 된 딸이나 (이또한 얼마만한 절망인가) 남편의 죄책감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부인의 비극을 집요하게 파고들지도 않는다. 영화에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더많은 눈물을 가져갈 수 있었겠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내며 OST 도 상당히 절제한다. 5일의 마중이란, 그녀가 오로지 믿을수 있는 남편의 편지에 "5일에 돌아가겠소." 라는 전언이 있자 매달 5일이면 어김없이 역으로 나가는 마중을 뜻한다. 얄궂게도 그 남편은 그녀 바로 곁에 있다. 집 바로 옆에 한칸 방을 얻어살며 그녀에게 매일 자신이 붙이지 못한 십년 동안의 편지를 읽어주고, 피아노를 고쳐주고, 눈비오는 5일날의 마중을 거든다. 수년이 지난 후에 루시옌(남편 이름) 펫말을 본인이 고쳐들고 쇠약해진 아내를 태운 수레를 끌고나가 역에 하염없이 서있는 마지막 장면은 울컥하기도 어려운 무게가 있었다.

영화를 보며 남편이 여러모로 내 취향 (외모라든가 직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성격, Deja vu를 의사보다 잘아는 불어실력 등)이라 즐거웠는데 사실 영화의 주인공은 공리지만 모든 장면은 그를 통해 빛난다. 부인에게 추억을 살려주기 위해 본인이 즐겨치던 먼지쌓인 피아노를 조율해서 치는 장면이 정말 좋았다. 부인이 외출한 사이, 몰래 들어와 피아노를 열고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연주를 시작한다.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마지막 몇 층계를 남기고 기억이 얼핏 돌아온 표정으로 현관문을 올려다본다. 그때 빛에 반사되는 먼지들과 선율이 숨막힐만큼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릴때까지 울지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 끝까지 부인에게 남편은 낯선이이므로 허무하다거나 남편이 불쌍하다고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남편의, 허공의 먼지를 잡듯 기억을 잡아내려는 손짓과 낯익은 순간들을 되새기는 노력, 기꺼이 짊어지는 세월은 요근래 내가 본 중에는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였다.

​Note.
# 남편의 로맨스라고 했지만, 부인 또한 도망자인 아버지를 따라가지 말라는 딸에게 "지금까지 십년간 너에게 헌신했으니 이제 너희 아버지한테 가려한다" 고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이나, 남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도 그의 편지속 언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서 충분히 존경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 공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예쁜 옷과 표정 모두 포기하고도 여배우의 저력은 여전했다.

​# 피아노 장면의 곡은 'Arrangement of the Song of Fishermen' 랑랑 작곡, 연주

# 영화 <홍등> 도 다시 보고싶어졌다. 그때 반했던 공리의 처연한 턱과 도도한 입술의 흔적을 영화을 보는 중에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