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대화
완전한 대화라는건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을까. 면역 체계가 완성되는 성인에 더 빈도가 높아진다는 알러지처럼,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성장과 경험이 더해갈수록 점점 어렵다.
1. 배려 하기 위해 아껴야 하는 말들이 있다. 중립적으로 뱉은 말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종류의 상처에 의도가 고의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의 말에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와 누웠을때 곱씹으며 가슴 아파한다는건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나도 많은 순간 누군가에게 그래왔고 앞으로도 완전히 막을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피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고 보면 마음놓고 말할수 있는 상대의 풀은 한참 줄어든다.
1-1.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어느 부분에 취약한 구석이 있을지 모르니까 무심코 뱉는 말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2. 반대로,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일수록 더 상처받지 않길 바라니까 가까이 있을수록 조심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의지했던- 나보다 강자라도 느꼈던 사람들도 차차 그 카테고리안으로 들어온다.
2. 사회 생활을 위해 아껴야 하는 말들이 있다. 나는 깊이로나 폭으로나 친구들을 많이 알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소셜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감정적인 서포터이든, 취향의 공유이든, 일에 있어서든 나로부터 존중받을 무언가를 가진 이들이다. 내 기준에 그런 면이 있는 친구면 나는 가능한 수용폭을 넓히려고 한다. 왠만하면 맞장구쳐주고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상대의 얘기는 무슨 말이든 들어주지만 나의 정치나 종교, 취향은 잘 말하지 않는다. (정치>종교>취향의 순서로 엄격하게) 의외로 어떤 성향이 극단적인 사람들이 존중받을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몇번 봤다.
3. 나를 지키기 위해 아껴야 하는 말들이 있다. 이건 몇번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인데, 인간은 대개 연약하고 본인 위주의 선택을 한다. 가장 최근의 일은 스스로를 마더 테레사라 칭하던 직장 1년 선임인데 간이라도 내어줄것처럼 나를 위해주는 시늉을 해서 깜빡 넘어갔다. 물론 그 모든게 연기만은 아니었을테고 초반부터 악의가 있진 않았을텐데 어느 순간 콤플렉스가 폭발하면서 내가 토로한 이야기들을 무기로 들고 괴롭혀오기 시작했다. 꽤 골치가 아팠는데 조력자의 도움으로 멘탈을 겨우 지켜냈다. 상대가 생각보다 밑천이 빨리 드러나기도 했고. 요즘에야 생존은 모든 본능과 가치관과 종교에 앞서기도 한다는걸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만, 내 입을 조심하면 된다는 결론은 여전하다.
결국 모든 대화 주제를 공유할수 있는 상대란 없다. 쓰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나 자신한테도 그럴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